한국 경제에서 재벌그룹이 차지하는 경제적 비중은 절대적이다. 재벌닷컴이 지난해 기준 자산 순위 상위 30대 대기업집단의 경제지표를 조사한 결과 30대 재벌그룹은 국내 기업 전체에서 차지하는 자산과 매출, 순익이 절반을 넘는다. 국세청 자료를 보아도 우리나라 전체 세수 중 25% 정도인 법인세 가운데 60%를 30대 재벌그룹이 담당한다. 여기에 재벌그룹 소속 계열사에 몸담은 임직원들이 납부하는 소득세까지 합치면 전체 세수의 최소 30%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중견, 중소기업도 재벌과 직간접으로 사업적 연결고리가 없으면 독자 생존하기가 쉽지 않다. 소재나 부품을 재벌그룹 계열사에 납품하거나 재벌그룹이 만들어낸 제품을 유통하는 보완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상위 30대 재벌그룹의 사업영역을 보면 전기전자 자동차 철강 조선 화학과 같은 중후장대형 사업은 물론 식품 유통 인터넷 숙박 등 우리나라 경제를 떠받치는 주축산업을 거의 장악하고 있다. 재벌그룹을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식 경제구조인 셈이다.
이런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재벌에 미세한 이상이라도 생기면 한국 경제는 근간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한국 경제는 20여 년전 이를 경험한 적이 있다. 1997년부터 3년간 한국 경제를 나락에 빠트린 외환위기가 그것이다. 당시 거대 재벌들은 전 세계적인 저금리 바람을 타고 무한확장 경쟁에 나서면서 빚더미에 앉았다. 10대 그룹마저 부채비율이 평균 500%를 넘어 이자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부도상황에 몰렸다. 결국 재벌의 항복으로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다.
요즘 한국 경제계의 촉각은 재벌의 안전성에 쏠려 있다.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는 재벌 위기설에 국민은 마음이 불안하다. 한국 경제를 이끌고 있는 삼성의 반도체, 현대차의 전기차, SK의 에너지, LG의 2차전지, 포스코의 철강 등 핵심 산업이 흔들리고 있다는 분석이 흘러나오고 있다. 여기에 내수 한계에 직면한 건설 유통 화학 산업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경기침체의 조짐은 롯데 GS 신세계 같은 대마 그룹들을 점점 막다른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최근 재계 순위 50위권에도 못드는 홈플러스의 사실상 부도사태로 경제가 휘청거릴 정도인데 만약 상위권 재벌에서 이상이 생기면 어찌될까.
한국 재벌의 역사는 올해로 80년 정도다. 일제 침탈시대에도 지금의 대기업과 같은 거상은 존재했지만 본격적인 자본주의가 시작된 관점에서 출발한 재벌은 해방 이후로 봐야 할 것 같다. 그동안 한국 경제계에는 수많은 재벌이 탄생하고 사라졌다. 재벌닷컴이 전경련과 대한상의 등 경제단체의 자료를 근거로 조사한 결과 시대별 화폐가치를 기준으로 재벌급으로 분류되는 곳은 1945년부터 2024년까지 대략 130개 정도였다. 이 중 2024년 현재 재벌 반열에서 제외된 곳은 50여 개다. 한때 거대 재벌로 군림했던 대우 쌍용 동아 고합 삼미 동양 우성 진로 율산 국제 아남 한보 신동아 거평 해태 대농 조양상선 동방유량 등 20여 곳은 망하거나 사라졌다.
현재 재벌의 판도를 좌지우지하는 대기업집단의 면면을 보면 2000년 이후 새롭게 등장한 곳이 많다. 하지만 2024년 말 자산 기준으로 상위 30대 재벌을 보면 HD현대 GS CJ 현대백화점처럼 기존 거대 재벌에서 분가를 통해 독립 재벌로 출범한 곳이 20% 정도다. 창업주 사후 형제 간, 친족 간, 사업동지 간 기업분할 혹은 경영분리를 통해 새롭게 출범한 곳이다. 자수성가한 신흥 재벌은 카카오 셀트리온 네이버 중흥건설 등 10% 조금 넘는다.
한국 경제에서 대마불사라 불리던 재벌도 살아있는 생물처럼 시대의 환경과 흐름을 타거나, 놓칠 경우 극심한 부침을 보였다. 시대를 역행하거나 산업의 물결을 놓치면 언제든 거품처럼 사라졌다. 한국 재벌이 처한 현재와 미래의 경영 환경은 녹록지 않다. 여기에 한국 재벌이 가진 독특한 제왕적 경영지배구조의 리스크까지 상존하고 있다. 총수의 판단과 능력에 기업의 운명을 걸어야 한다는 얘기다. 재벌 3세 경영시대가 본격화된 이후 총수의 변별력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경고음이 울리는 곳도 여럿이다. 한국 경제의 주축인 재벌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제도적 안전장치를 다시 점검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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