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 범죄가 급속히 진화하고 있다. 인공지능(AI) 기반의 ‘딥페이크 음성 사칭 기술’로 피해자를 속이거나 악성 코드를 삽입해 피해자 휴대전화를 원격 조종한다. 그만큼 피해 규모가 급증한다. 올해 7월까지 발생한 보이스피싱은 1만4707건, 피해액은 7766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전년 동기 대비 두배 가까이 증가한 수치다. 정부가 ‘보이스피싱과의 전쟁’을 선포한 이유다. 금융위원회가 28일 보이스피싱 피해액 일부 또는 전부를 금융회사가 배상하도록 ‘무과실 배상책임’을 연내 법제화하기로 한 것은 의미 있다.

윤창렬 국무조정실장이 28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보이스피싱 근절 종합대책 관계부처 합동브리핑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 AI기술을 활용하거나 고도의 시나리오를 통한 범죄 수법이 많아 국민 개개인의 주의와 노력만으로는 효과적 피해 예방이 어려운 게 사실이다. 금융당국은 지난해부터 ‘금융사 자율배상제도’를 운영했다. 은행의 이상거래탐지시스템(FDS) 운영 수준과 고객 과실 여부를 종합해 배상 여부를 결정하는 제도인데 실효성이 낮다는 지적을 받았다. 정부가 금융권 책임을 한층 강화하고 보이스피싱 대응 역량을 평가하기로 한 것은 잘한 일이다. 이미 해외에선 금융기관 책임을 강화했다. 영국 정부는 은행과 전자결제서비스업체에 최대 8만5000파운드까지 피해배상을 의무화했다. 그동안 금융사들이 자체적으로 이상거래탐지시스템(FDS)를 운영하며 사기의심 거래 탐지, 이체 지연 등 임시조치를 하고 있으나 정보 공유가 제한돼 대응이 늦었다. 정부는 금융회사·통신사·수사기관 등이 보유한 보이스피싱 관련 정보를 공유하도록 ‘AI플랫폼’ 구축을 서둘러야 하겠다.

보이스피싱 책임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통신사에 관한 제재를 강화한 점도 눈길을 끈다. 보이스피싱 범죄는 알뜰폰을 포함한 통신망을 기반으로 이뤄지고 있다. 외국인 명의로 개통된 대포폰이 주요 범행 수단으로 활용된다. 앞으로 통신사는 특정 대리점·판매점에서 외국인 가입자 급증 등 이상 징후 판별 기준을 마련해 정부에 신고해야 한다. 정부는 불법 개통이 다수 발생하면 이통사의 등록을 취소하거나 영업정지를 하는 등 강력한 제재를 부과해야 할 것이다. 보이스피싱은 통신·금융망의 허점을 파고드는 사회 범죄다. 수법은 갈수록 지능화되고 교묘해지고 있다. 피해자가 해마다 증가하는 것은 경찰의 수사역량이 떨어진다는 말이다. 범죄조직이 해외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는 사례가 많은 만큼 국제 공조 체계를 강화해야 마땅하다.

보이스피싱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예방 교육을 강화하는 것도 국가의 책무다. 고령층이 ‘앱 설치 유도형’ 보이스피싱을 당하지 않도록 금융사와 통신사가 악성 앱 설치를 사전에 차단하는 기술적 장치를 갖춰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피해자가 길고 복잡한 환급 과정을 거치지 않도록 ‘피해환급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겠다. 정부는 보이스피싱이 더는 발붙이지 못하게 하겠다는 각오로 범죄 대응 역량을 총집결해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