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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달을 구경하다/ 정찬주

삶이 축복인데 오직 인간만이 생사에 웃고 우는 어리석은 존재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09-24 21:04:30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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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주위가 컴컴한 새벽 5시다. 서산 위에 보름달이 떠 있다. 며칠 동안 보지 못했던 별들도 또록또록 반짝이고 있다. 한가위를 하루 지났지만 달은 여전히 둥글다. 올해는 가을장마 탓에 보름달을 쳐다보지 못할 뻔했는데 참으로 다행이다. 달구경을 더 하고 싶어 손전등을 켜들고 아래 절까지 산책을 하고 돌아왔다.

달을 보니 지난 봄에 돌아가신 법정스님이 떠오른다. 스님을 불일암에서 마지막으로 뵌 때가 3년 전 백중날이었다. 서울 길상사를 들렀다가 그날 불일암으로 오셨던 것이다. 불일암에 올라가 보니 상좌스님과 다담(茶談)을 나누고 있었다. 늦은 오후가 되어 일어서려고 하자, 스님께서 밤에 보름달이 뜨는 것을 보고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밤길운전을 지레 걱정하며 내 산방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돌이켜 생각하면 '불일암에서 보름달을 보면서 스님의 법문을 더 들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 불일암에는 스님의 유언에 따라 맏상좌 덕조스님이 머물고 있다. 덕조스님에게 불일암을 10년 동안 지키라고 당부하셨던 것이다. 덕조스님은 부엌문으로 나와 나를 맞았다. 수류화개실로 들어가 차를 한잔하면서 앞문이 있는데 왜 부엌문으로 나오느냐고 묻자, 덕조스님은 "1주기 때까지는 앞문을 사용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문득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않는다는 옛말이 떠올랐다. 입적한 스승의 그림자마저도 밟지 않으려는 덕조스님의 얼굴은 하안거 정진의 뒤끝인지 해맑았다. 불일암을 떠날 때 나는 법정스님이 30여 년 전에 심은 후박나무를 안았다. 후박나무 껍질의 까칠하고 차갑고 부드러운 기운이 전해졌다. 후박나무는 스님의 내면과 외면을 닮았다. 스님은 얼굴과 손발을 씻는 양은 세숫대야도 구분해 사용할 만큼 당신 자신의 질서에는 엄했으나 형편이 어려운 학생이나 자신의 세계를 일구며 사는 타인에게는 따뜻했던 것이다.

낱말 중에 '돌아가시다'라는 우리말이 있다. '돌아가시다'는 '윤회하다'의 우리말이다. 그러고 보면 죽음은 인생의 종착역이 아니라 간이역이 분명하다. 스님은 입적 무렵에 이르러 속가의 인척이 찾아와 '이제 스님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묻자, '불일암이나 길상사로 오라'고 했던 것이다. 실제로 불일암 우물이나 채마밭에는 스님의 그림자가 어른대는 것 같았다.

갑자기 어린 강아지 새끼들이 낑낑대는 소리가 난다. 열이틀 전에 낳은 검둥이 새끼들이 어미에게 젖을 달라고 보채는 소리다. 새끼들은 흰둥이가 세 마리, 검둥이가 두 마리, 바둑이가 두 마리다. 아직 눈은 뜨지 못하고 있지만 코는 까맣고 촉촉하기까지 하다. 개 코가 촉촉한 것은 건강하다는 징표다.

검둥이의 이름은 지장이다. 불가의 지장보살에서 힌트를 얻어 지은 이름인데, 세상의 모든 생명에게 자비를 베푸는 보살의 의미를 생각해본다면 작명을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검둥이는 헌신의 화신이다. 나의 수고란 고작 하루에 한두 번 밥을 주는 것뿐인데, 녀석은 종일 충직하게 내 산방을 지키면서 나를 볼 때마다 꼬리를 흔들며 반긴다. 개는 꼬리로 감정을 드러낸다고 한다.

내 산방의 검둥이처럼 꼬리를 세차게 흔드는 개도 드물 것이다. 단 한 번이라도 내 산방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예외 없이 열렬히 환영한다. 그러니 손님들에게 사랑받지 않을 수 없다. 검둥이의 새끼들은 벌써 주인이 다 정해져 있을 정도다. 내 산방을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이 검둥이의 충직함을 알고는 욕심을 내왔던 것이다. 보성 미력면에 도자기 공방을 짓고 있는 다헌거사가 암수 한 쌍을, 면소재지에서 가스를 배달하는 양 씨와 떡 방앗간을 하는 오 씨가 아무 색깔이라도 한 마리씩, 그리고 산방의 농사일을 거들어주는 김 씨가 흰둥이나 검둥이는 싫증이 나니까 바둑이를 한 마리를 달라고 이미 부탁을 해놓고 있는 것이다.

여명에 드러난 검둥이 가족이 새삼 행복하게 보인다. 무슨 인연을 지어 내 산방에서 구물거리는지 어린 생명들이 신비롭다. 모든 생명은 살아있는 그대로가 축복인데 오직 인간만이 생사를 구분 지어 웃고 우는 어리석은 존재가 아닐까 싶다. 서산을 다시 보니 어느새 달이 지고 없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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